방금 산책을 다녀오는 길이다. 하루 종일 뚱한 표정이었다가 오는 길에 크게 미소지을 일이 있었다.

 

 키가 나보다 한 뼘은 더 큰 남자애(180은 가뿐히 넘어보였다.)가 좁은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손을 들고 건넜다. 마스크 위로 앳된 얼굴과 복장으로 미루어보아 초등학생으로 보였는데, 손을 들고 건너는게 귀여워 함박웃음을 지었다. 

 

 12살 까지 손을 들고 다녔었다. 그렇게 하는거라고 배웠기 때문에 그랬다. 생활기록부 기록으로 미뤄보아 160cm 정도의 결코 작지않은 덩치가 손들고 길을 건너는 장면은 그때 누군가에게는 무해한 코미디였을 것이다. 생각해보니 그 즘이었던 것 같다. 어른들이 시키는대로 하는것과 친구들과 함께 하는 것 사이의 괴리가 생긴 것이. 몇몇은 거친 욕을 입에 달고 살았다. 몰래 담배를 꼬나무는 친구들도 있었다. 학교에서보다 더 생생한 자료를 공유하며 셀프 스터디 형식의 성교육도 활발했었다. 그렇게 또래문화가 성행할 즈음 따돌림을 당했었기 때문에, 초등 고학년을 돌이켜보면 사실 축구이외의 또래문화 기억은 별로 없다. 

 

 하지만 문득 4학년 때 학교 운동장 좌측의 벤치에서 친구가 해준 말이 기억에 남는다. 넝쿨식물이 자연스레 많이 자라서 하늘이 다 가려져 있는 공간이었다. 여자애랑 단둘이 얘기한다는 왜인지 모를 쑥스러움 때문에 촘촘히 세워진 기둥 사이사이에 매달리다 시피해서 들었었다. 

"넌 욕을 많이 안해. 다른 애들처럼 그렇게 욕 많이 하지마"

 

 사실 이젠 이름도 흐릿하고 저 얘기를 해준 주인공이 그 친구가 맞는지도 헷갈린다. 그날의 기억을 대조하기 위해 다시 만날 수 있는 가능성도 없다고 본다. 초등학교 동창회..?  열려도 초대받을것 같진 않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 날 이후 선견지명에서 비롯한 현명한 조언을 철저히 받아들였다..면 좋았겠지만, 여느 남자애들처럼 어리석었다. 고등학교까지 친구들과의 대화는 그 시작과 끝이 대부분 욕설이었던 것 같다. 거의 욕설없이 산 지(군대는 예외로 치자) 벌써 10년이 되어간다. 

 

 언젠가 어느정도 나를 닮은 생명의 손을 잡고 횡단보도를 손들고 건너게 될 것이다. 오늘 본 친구를 생각하며 한 번 더 미소지어야 겠다. 미소를 예약해둔 삶이라니, 나름 운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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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구의 축가부탁을 거절한 적이 있다. 둘도 없는 절친한 친구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꽤나 종종 연락하며 지내던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이른 나이에 결혼 하게 되어 고심끝에 연락했을 터인데, 큰 부담 없이 도와줄 수 있는 부탁이었다는걸 알기엔 22살의 나는 너무 어렸다. '특출난 재능을 가진것도 아니고 무대에 서 본 경험도 없다'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거절했었다. 진한 아쉬움을 숨기지 못하는 친구를 뒤로하고 전화를 끊었던 당시엔 그게 그렇게 오래 미안할줄은 몰랐다. 

 

 친구의 결혼식 당일 다른 여러 친구들이 함께 꾸민 축가무대는 즐거웠지만 퍽 어설펐고, 그 엉성하지만 순수한 모습들에 난 고개를 제대로 들 수 없었다.

 

 그 날 이후 그 친구와는 결국 자연히 멀어졌다. 5-6년 여가 지난뒤에야 동창들 모인 술자리에서 그 친구를 만났다. 술기운을 빌려 정말 미안했노라고 사과했을때, 그 친구는 괜찮다고 하지만 그땐 참 서운했었다고 털어놓았다. 그저 고개를 주억거리며 연거푸 잔을 비우고 몇 번은 사과했던 것 같다. 그 날 잘 들어갔는지 연락한 이후, 아직 한번도 연락해보진 못했다.

 

 이 이야기를 주변 지인들과 나누면, 혹자는 별것도 아닌일에 왜 굳이 나서서 죄책감을 갖냐고 말하기도 한다. 생겨먹은 구조가 좀 특이해서 그런게 제일 크다. 특히 감정적인 갈등상황에 있어서 '만일 내가 당하면 어떨까?'가 제1기준이다. 소심하고 속좁은 인간이기에 거절당했다면 아마 꽤나 서운해 했을테다. 자연히 내 기준에 예상되는 서운함 만큼 미안함이 클 수 밖에 없다.

 

 친한 형이 내년 11월에 결혼한다고 연락이 왔다. 아직 아무런 부탁을 하지 않으셨지만, 뭐든 해달라고 하면 하겠다고 해야겠다. 얼굴이 두꺼워져서 웬만한 상황은 천연덕스러운 척 넘길 수 있게 되었다. 그럼에도 상상을 하는것 만으로도 괜히 떨려온다. 

생각난 김에 해버리는게 어떨까?

철저한 계획을 쌓고, 단계적으로 실천하며 나날이 조금씩 발전해 나간다.
너무 뻔하고 간단한 이야기지만 그게 성장과 성공의 정도다.

라고 말하는 것도 지겹게 들린다.

 

꼭 그래야만 하나? 대 천재가 아니더라도 잠깐씩 흥미가 돋을 때만 집중해서는 적정 수준 이상으로 성장할 수 없는 걸까? 하는 의문에서 이 글은 시작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실증적으로 내가 해봤더니 되더라 하는게 제일 좋을텐데 아직 그렇게 대단한 일은 해낸 적이 없어서 글의 결론은 없다는 걸 미리 밝혀둔다.

 

하지만 나는 꽤나 오래 벼락치기형 인간으로 살아왔다. 장기기억으로 갈 수 있도록 차근차근한 학습을 했다기 보다는 직전에 강력한 몰입으로 딱 맞춰 처리해온게 대부분이다. 미리미리 과업을 처리해 본 경험은 정말 손에 꼽는다. 

 

물론 그랬기 때문에 인생 이 꼴이다 생각이 들때도 있긴 하지만, 최악으로 허접한 결과만을 내지는 않았다. 나름 많은 경쟁에서 우위를 점할 때도 있었다. 

 

생각과 계획만 많고 특별한 실천이 없는 사람에게는 단계별로 하나씩 해나가는 것보다 그때 그때 필요에 의해서라도 한 걸음씩 성장해나가는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해서 다양한 분야에 대해 어쨌든 시간에 맞춰 결과물을 뽑아낼 수 있는 인재라면, 바야흐로 문어발식 인재라고 부르기에 적당하지 않을까?

 

내가 개념의 주창자로서 선두주자가 되어야 겠다.

 

실증하기 위해, 오늘도 한걸음 나아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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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즌 별로 종종 걸리는 병이 있다. 병이라기 보다는 알레르기처럼 체질상의 문제로 때때로 터지는 증상의 집합으로 보는게 맞겠다.

 

 주된 증세는 여러 사이트들을 돌면서 채용공고를 확인하는 것이다. 취업을 위해 당연히 필요한 일련의 활동이 알레르기라니 혹시 역병에 걸린거 아닌가 의심이 든다. 체온은 정상범위가 맞다. 그리고 적당히 보는게 아니라 하루에 3~4시간을 볼때도 있으니 그게 중독인것이다.

 

 크리스탈 클리어한 대책 없이 회사를 박차고 나온 뒤, 우연한 기회와 마음을 모아 숭고한 데이터, IT의 길에 이 한 몸 헌신할 것을 맹세하였었다. 몇 달 간의 교육을 거쳤지만 예상과는 달리 기업들이 나를 데려가기 위해 혈투를 벌이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솔직히 혈투까지 상상했던건 아니지만 그래도 나를 두고 두 개 정도의 기업이 머리채 잡고 싸우는 상황을 예상했었다. '얘는 네가 데려가라, 싫다 네가 데려가라.. ' 정도는 될 줄 알았다. 

 

 넣는 족족 추풍 낙엽처럼 튕겨나오는 서류들을 보며 정신이 바짝 들었다. 잘 좀 부탁한다고 지원동기까지 세세하게 적어서 앞 주머니에 꽂아줬는데, 그렇게 헌신짝 처럼 탈락시키다니.. 언젠가 성공하면 복수해야할 기업들의 리스트가 스팸메일처럼 쌓여간다. 

 

 채용공고를 읽다보면 아주 가끔씩 가능성이 엿보이는 공고들이 있을 때가 있다. '될 지도 모르겠는데..?' 싶은 생각이 드는 순간 시야는 확 바뀌며 한 단계 밝아진 세상이 펼쳐진다. 목에 걸린 적당한 무게감의 사원증을 무시하려 애쓰며, 한 손으로 커피를 홀짝이며 다른 한손으로는 IT분야 입사자에게 지급된 최신형 맥북프로를 만지작대며 어제 배포한 대시보드 리포트에는 문제가 없는지 살펴보는 내가 보인다. 이 때 핵심은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은 채여야 한다. 전화나 슬랙이나 카톡 따위에 찌들어서 엑셀 켰다가 줌 켰다가 메일 켰다가 그러면 안된다. 

 

 혼자 키득대는 와중에 에어컨 바람이 너무 차서 가디건을 주섬주섬 입었다. 현실은 역시 냉혹하다. 마침 주어진 25분의 시간도 끝나간다. 잡코리아 5분만 보고 공부하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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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 소파에서 오늘 비가 올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어제도 오던 거 무슨 차이겠는가 하는 마음으로 마저 준비했다.

성수역까지는 괜찮았다. 아직도 다소 멀게 느껴지는 교대역에 도착해서 고개 푹 숙이며 계단을 오를때에도 괜찮았다.

 

  6번 출구 바로 옆엔 마을버스 정류장이 있다. 보통도 줄을 서서 기다리는 그곳에 도착해보니,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장대비가 들이치는걸 보고있자면 우산이 찢어질까 걱정되기 시작하는 그런 수준이었다. 

 

 별 수 없는 발걸음을 옮겨 줄에 맨 뒤에 섰다. 예정된 수순처럼 내 바짓가랑이는 젖어들었다.

 

 어제 귀갓길에 마주친 댄디한 스타일이 멋져서 오늘은 2주만에 양말을 꺼내서 운동화를 신은 날이다. 샌들을 신으면 그 느낌이 안날 것 같아서 운동화를 신은 그런 날이라는 것이다. 

 

 아침소파에서 나는 깨달았어야 했다. 시국에 맞춘 오랜 칩거생활로 비가온다는게 어떤 의미인지, 양말이 젖으면 어떤 기분인지 잊고 있었다. 하지만 기억했어야 했다. 망각의 대가는 참혹했기 때문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하던데, 여분양말을 잊은 중생에게도 상쾌한 아침 따위는 주어지질 않았다.

 

 늘 10번 버스를 탔기 때문에 2번 버스가 먼저 오고 사람들이 허겁지겁 2번 버스를 탈때에는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나보다 늦게 줄 선 이들도 합류하여 2번버스가 꽉 들어찰 즈음 하늘엔 기어코 구멍이 뚫리고 말았다. 거의 다 찬 버스임에도 기어코 몇을 더 태우려 기다리는 기사님에게 애타는 눈빛을 열심히 송출했지만 들어먹힐리 없었다.

 

 빗소리가 노이즈 캔슬링을 뚫기 시작하고 내 마음도 한없이 차가워질 때쯤이 되어서야 10번 버스에 탈 수 있었다. 

버스로는 4분만 가면 되는 거리를 오늘따라 3분만에 도착해서 내렸다. 비는 거의 느껴지지 않을 만큼 부드러운 미스트로 변해 있었다. 버스정류장에는 2번 버스의 노선도가 떡하니 붙어있었다.

 

 조용하게 장점이던 이 공간도 왜인지 유난히 시끄럽고, 양말은 축축하다. 물 마실 때 잠깐 마스크를 내리면 티나지 않게 냄새를 맡아본다. 

집에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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